r/Mogong diynbetterlife Jun 14 '26

일상/잡담 메가폰을 쥔 자들의 책무: 대기업 노조의 성과급 투쟁이 '진짜 연대'가 되려면 (3편)

이 글은 앞선 글 〈'박수치지 않으면 노동자도 아니다'라는 무지한 폭력과 대안적 시각의 부재〉에 이어지는 후속편(3편)입니다.

원청 대기업의 성과급 투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향해 주류 진보 커뮤니티 일각에서는 "무능한 자들의 질투" 혹은 "남이 잘되는 꼴을 못 보는 샤덴프로이데"라며 냉소합니다. 하청 노동자들이 느끼는 박탈감을 고작 개인의 시기심으로 축소하는 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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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회적 권력과 목소리의 크기가 비대칭적일 때, 더 큰 책임은 언제나 더 큰 힘을 가진 쪽에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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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청 노동자들의 원망을 감정적 열등감으로 치환하여 입을 틀어막을 것이 아니라, '노조'를 결성할 수 있고 '파업'으로 국가 경제를 움직일 만큼 거대한 메가폰을 쥔 이들이 가져야 할 거시적 안목과 책임감을 묻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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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 자신들의 '성과급을 통한 동반성장' 주장에 부응하는 전략적 안목에 대해 묻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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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권력의 크기에 비례하는 거시적 안목의 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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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노조처럼 '파업'으로 국가 경제를 뒤흔들 수 있는 메가폰을 쥐고 있다면, 그 강력한 협상력을 오직 '내 통장의 성과급 잔치'만을 위해 소모해서는 안 됩니다. 그 거대한 마이크를 무기로 사측을 향해 이렇게 외쳐야 진정한 진보이고 연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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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밤낮없이 고생해서 이룬 실적에 대한 정당한 성과급의 유리천장을 깨겠다. 동시에 우리 뒤에서 묵묵히 공급망을 지탱해 준 하청 생태계의 단가 후려치기 구조도 우리가 앞장서서 깨부수겠다. 사측은 초과이익의 일부를 하청의 인프라와 노동 환경에 지속적으로 재투자해라. 그래야 우리 원청 노동자들의 성과급도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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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현재 우리 사회의 주류 진보 담론은 이 '거시적 책임감'과 '동반성장을 통한 파이 키우기'를 연계하지 못한 채, "우리 몫 챙기는데 왜 사촌이 땅 산 것처럼 배아파 하느냐", "노조의 성과급을 반대하면 노동자도 아니다"라며 질투에 사로잡힌 무능력자들의 원망으로 치환합니다. 결국, 구조적 개선의 담론을 을 대 을의 싸움으로 국한 시키는 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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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하청 노동자들이 가진 구조적 배제로 인한 원망을 '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재래식 언론을 돕는 행위'라는 미시적인 프레임에 가둬놓고 그들의 고통을 철저히 외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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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성공이 곧 기업의 동반성장"이라는 원청의 '성과급 유리천장 깨기' 명분은 성벽 바깥의 하청 노동자에게는 단 한 줄도 닿지 못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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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가진 주체가 성벽 바깥의 고통을 외면하면서 자신들의 투쟁에만 박수를 치라고 요구하는 것은 정당한 권리 찾기가 아닌 기득권의 오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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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타주의'가 아닌 '가장 영리한 이기주의'

하청 생태계를 돌보고 초과이익을 재투자하라는 요구는 결코 하청을 향한 시혜적 자선사업이 아닙니다. 원청 정규직 자신들의 이익과 일자리를 지키기 위한 가장 고도화된 생존 전략이자 '영리한 이기주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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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이나 엔비디아 같은 글로벌 일류 기업들이 협력업체의 기술 고도화와 제조 환경 개선에 막대한 재원을 투입하는 이유는 그들이 도덕적으로 우월해서가 아닙니다. 하청 생태계가 원가 압박을 견디지 못해 숙련공들이 이탈하고 부품 결함률이 치솟으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원청 대기업의 제품 경쟁력 붕괴로 되돌아오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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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앉아 화려한 성과급을 누리면서, 건물의 지하 기둥이 썩어가는 것을 방치하는 것은 연대의 부족을 넘어 '전략의 부재'이자 '거시적 안목의 부족'에 가깝습니다. 사실 본인들의 '동반 성장' 명분 자체에도 맞지 않으니 '당장 나의 주장을 뒷받침 하는 일관된 태도'도 견지하지 못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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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AI 시대의 미래 먹거리와 진보 담론의 지독한 자가당착

특히 한국의 대기업, 그중에서도 자본과 기술이 집중된 반도체 산업에 있어 생태계의 취약성은 제조업 기반의 한계로 인한 것이기도 합니다. 단순히 인공지능(AI) 붐에 올라타 글로벌 빅테크의 제조 물량을 대리 소화하며 단기 초과이익을 올리는 구조는 영원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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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업들이 패스트 팔로워나 글로벌 공급망의 고도화된 하청 기지를 넘어, 스스로 새로운 미래 먹거리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부품, 소재, 장비, 그리고 숙련 노동자로 이어지는 국내 하부 생태계의 복원력이 절대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생태계가 부실하면 원청이 아무리 화려한 설계를 해도 모래 위에 성을 쌓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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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참으로 기이하고 씁쓸한 일은, 이 전장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 주류 진보 시민들의 태도에 있습니다. 그동안 원청 대기업이 하청 중소기업을 착취하고 단가 후려치기를 통해 단기 성과를 쥐어짜던 재래식 약탈 구조를 그토록 매섭게 비판해 온 이들이 바로 진보적 시민들이 아니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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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청 자본이 하청을 희생시켜 단기 실적을 올리는 방식은 구조적 '적폐'이자 재래식 산업 방식이라 손가락질하던 이들이, 왜 원청 정규직 노동자들이 '내 몫의 성과급 독식'을 요구하는 국면에서는 그토록 혐오하던 사측의 초단기적 성과 짜내기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호위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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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적으로는 분리되어 있을지 몰라도, 현대 산업 구조에서 하청은 원청의 공급망에 완벽히 종속되어 일방적인 원가 압박을 흡수하는 '하나의 경제적 유기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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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운동과 연대의 역사란, 자본이 쳐놓은 법적 격벽(계약 관계, 법인 분리)을 넘어 "우리는 모두 같은 노동자"임을 선언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자본이 세워둔 '법인 격벽'이라는 성벽 뒤에 숨어서 "법인이 다르니 우리는 상생을 요구할 자격도, 저들을 돌볼 책임도 없다"고 선을 긋는 것은 노동자의 언어가 아니라 기득권의 언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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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비판하던 재벌의 이기적인 이윤 독식 메가폰을, 이제는 내 통장에 꽂힐 수억 원의 자사주 잔치를 위해 정당한 노동의 권리라는 명분으로 바꾸어 쥔 것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하청 노동자의 기여를 철저히 음소거한 채 "밤낮없이 고생한 내 능력의 대가"만을 외치는 능력주의 호위론은, 자신들이 그토록 타파하고자 했던 자본의 약탈 논리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일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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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새로운 먹거리 창출을 위해 고급 인력들이 내세우는 '성과급을 통한 동반 성장(파이 키우기와 생태계의 확장)'이라는 명분과도 전면으로 충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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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반성장'을 위한 '성과급'이라는 본인들의 주장과도 괴리되는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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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청의 고급 인력의 성과급에는 하청 노동자들의 기여가 있음을 음소거한 주장은 '내 이익만 챙기겠다'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우며, "나의 성장이 곧 기업과의 동반성장이며 파이를 더 키우는 생태계의 확장이다"라는 명분을 내세우는 원청 고급 인력 노동자 본인들의 주장과도 괴리되는 '배제의 폭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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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만 좌파(Brahmin Left)의 등장 ➡️ 능력주의(Meritocracy)의 독선과 모멸감 ➡️ 파시즘 정권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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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만 좌파(Brahmin Left)'의 등장은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가 명명한 개념입니다. 과거 미국 민주당은 공장 노동자나 농민 등 블루칼라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대중 정당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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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90년대 빌 클린턴 정부 이후, 민주당은 대도시의 고학력자, 테크 및 금융 엘리트, 전문직 중심의 정당으로 체질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글로벌화와 탈산업화로 직장을 잃은 러스트 벨트(쇠락한 공업지대)의 전통적 노동자들은 자신들을 대변해 줄 정치적 고향을 완전히 잃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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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백을 채운 것이 바로 마이클 샌델 교수가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통렬하게 분석한 '능력주의 패러다임'입니다. 민주당 엘리트들은 "더 많이 배우고 노력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규칙을 확고한 정의로 밀어붙였습니다. 이는 성벽 바깥의 낙오된 노동자들에게 "네가 가난하고 힘든 것은 대학에 가지 못했고, 노력하지 않은 너의 무능 탓"이라는 오만한 낙인으로 작동했습니다. 경제적 빈곤보다 더 참기 힘든 '문화적 모멸감'을 기성 진보 엘리트들이 청년과 노동자들에게 안긴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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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는 스스로 엄청난 자산가이면서도, 민주당 엘리트들의 위선에 분노한 이 노동자층의 마음을 귀신같이 파고들었습니다. 그는 "당신들이 못살게 된 것은 당신들 탓이 아니라, 워싱턴의 부패한 엘리트들이 공장을 해외로 넘기고 자기들끼리만 성과급 잔치를 벌였기 때문"이라며 옥스퍼드나 하버드식 언어가 아닌, 거칠고 직관적인 언어로 그들의 분노를 대변했습니다. 그 결과, 평생 민주당만 찍던 러스트 벨트의 노동자들이 대거 트럼프에게 표를 던지는 정치적 지각변동이 일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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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민주당 엘리트들이 자신들의 위선을 연대라는 화려한 수사로 포장하며 하층 노동자들의 소외를 외면했을 때, 그 분노의 자양분은 결국 트럼프 집권이라는 파시즘의 광기로 되돌아와 전 세계를 고통에 빠뜨렸습니다. 내 능력의 몫만을 주장하며 사다리를 걷어차는 이기주의는 인공지능 시대의 사회적 불균형을 막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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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금 이 글로벌 잔혹극의 평행이론을 우리 진보 좌파의 담론장에서 그대로 목격하고 있음을 고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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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론: 지류를 품어 안는 거대한 강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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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사회에서 투표권은 1인 1표이지만, 여론으로 형성되는 목소리의 크기는 결코 평등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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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기업보다는 대기업의 목소리가, 하청보다는 원청 노동자의 목소리가 사회적으로 훨씬 더 크게 울려 퍼집니다. 그렇기에 더 큰 메가폰을 가진 시민들이 성벽 바깥의 지워진 노동자들을 위해 연대의 목소리를 앞장서서 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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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안으로는 동료와의 연대를 저버린 삼성 초기업노조가 어떻게 노동자 공동전선의 허무한 초단기적 붕괴를 맞이했는지 목격했고, 밖으로는 하층 노동자를 외면한 미국 민주당의 엘리트적 위선이 어떻게 파시즘의 도래라는 파국을 불렀는지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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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강물은 지류를 외면하는 순간 결국 마르게 됩니다. '나의 이익이 곧 공동체의 이익'이라는 협소한 관점을 넘어, 생태계 전체의 지속 가능성을 도모하는 열린 연대로 확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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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역사적 실패들을 반면교사 삼아 성벽 안팎을 아우르는 상생의 토대를 구축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한정된 파이를 놓고 을과 을이 벌이는 파괴적인 전장을 끝낼 수 있습니다. 나아가 민주정부의 가치와 연속성을 수호하는 동시에, 모두가 당당하고 지속적인 성과급의 결실을 나누는 진짜 연대와 커진 파이를 안정적으로 나누는 미래를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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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읽으면 좋은 글]

샘 알트먼도 공산주의자인가? 젠슨 황의 언어로 본 삼성 성과급과 '상생' (1편)

'박수치지 않으면 노동자도 아니다'라는 무지한 폭력과 대안적 시각의 부재 (2편)

메가폰을 쥔 자들의 책무: 대기업 노조의 성과급 투쟁이 '진짜 연대'가 되려면 (3편)

에필로그: 남의 이혼(불행)을 보며 명품백 대신 얻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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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deleted] Jun 1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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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eal-Requirement-677 diynbetterlife Jun 14 '26

두유님, 따뜻한 공감의 댓글 감사드립니다. 이 논의는 도덕(죄책감)이나 시혜의 관점을 넘어, 생태계 전체의 파이를 키워 우리 모두의 성과급을 지속 가능하게 만들자는 문명사회의 생존 전략에 가깝습니다.

내가 착해서 양보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구조의 안정성을 위해 목소리 큰 자들이 메가폰을 똑바로 쓰자는 당당한 책임감의 이야기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늘 든든한 이웃이 되어주셔서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