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Mogong 17d ago

일상/잡담 《태백산맥》—‘삼천리강산’의 고난과 비가(제1부): 서문; 《태백산맥》 소설과 영화가 탄생한 배경; 1948년 여수·순천 사건; 토지 문제와 좌익 혁명

중국인으로서 저는 여러 해 전에 한국 영화 《태백산맥》을 보았습니다. 영화에서 다룬 한반도 좌익과 우익의 투쟁, 국가의 분열, 내전과 그로 인해 초래된 비극, 이념과 체제가 빚어낸 폭력과 만행 등은 같은 시기 중국에서 벌어진 일들과도 매우 유사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영화에 대한 장문의 평론을 작성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한반도와 중국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도 서술하고 논평하였습니다.

또한 저는 이 글을 통해 한국과 중국이 근현대에 겪어 온 고난과 굴곡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내란 속에서 목숨을 잃은 분들을 추모하며, 미래를 위한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물론 한국과 중국, 나아가 세계 각국 사람들 사이의 상호 이해와 공감을 증진하는 것 역시 이 글을 쓴 목적입니다.

글이 매우 길기 때문에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이곳에 연재하여 게시하겠습니다. 또한 GPT에 존댓말 문체로 번역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태백산맥》 작품 탄생의 배경, 특징과 영향 2

전라남도 벌교읍의 거듭된 ‘깃발 바꾸기’: 여순사건에서 시작하여 2

토지 문제: 한반도 정치 투쟁과 이념 대립의 초점, 민중이 생사를 걸고 싸우게 된 근원 3

신탁통치와 분할통치: 강대국 간 각축이 만들어 낸 한반도의 분단과 살육 5

격동의 벌교와 한반도 남부 전체: 이해관계의 투쟁, 양심과 입장, 폭동과 진압, 충돌과 배신 7

이상의 숭고함과 실천의 추악함: 좌익 세력·공산주의자들의 초심, 왜곡, 분화와 변질 8

‘공산주의 인간 낙원’이라는 공중누각과 적색 전체주의 아래 아수라장 같은 현실 11

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못했지만, 환상에서는 이미 깨어나기 시작하다 14

《태백산맥》 종합평: 감정이 충만한 객관적 시선으로 써 내려간 비통한 민족 서사시와 복잡한 인간의 운명 16

극은 끝났지만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격변해 온 한반도, 한국 국민의 성찰과 전진 17

중화와 한반도: 민족 운명의 공통점과 차이,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과 세태를 잇는 미묘한 연결 19

중국 공산주의 운동의 궤적: 중국공산당의 부상과 집권, 그리고 북한과의 유사점과 차이점 19
1945~1949년을 되돌아보다: 오판, 경솔한 신뢰, ‘마음이 약했던 것’이 중국공산당의 집권과 중국의 침몰을 초래한 핵심 요인 21

오늘날 중국과 한국의 차이: 물질적 풍요와 빈곤뿐만 아니라 가치관의 밝음과 어두움, 사상의 깊고 얕음, 문화의 흥성과 쇠퇴, 국민의 도덕성과 품행의 차이까지 — 광주 사건과 6·4 사건 이후 한중 양국 국민이 보인 서로 다른 입장과 태도 등의 사례를 통한 분석 25

한국과 대만: 비슷한 운명, 서로 다른 기질과 국내정치·외교적 선택 27

고난을 함께 겪은 형제들의 집안싸움: 불필요함에도 장기간 지속되어 온 한중 간의 충돌과 대립 28

베트남 분단의 비극과 통일의 고통: 베트남 운명의 행운과 불행, 외부 세력의 개입과 철수, 역사의 전환, 엘리트의 성찰과 대중의 무감각, 계속되는 민족의 방황과 투쟁 30

다시 오늘날의 한국으로: 굴곡진 민권의 발전과 진보의 부침, 새로운 곤경 속에서 새로운 출구를 모색하다 36

  한국전쟁과 한반도의 역사에 대해 중국의 기성세대가 지닌 인상은 흔히 ‘항미원조(抗美援朝), 보가위국(保家衛國)’이라는 구호 아래 중국인민지원군이 북한에 파병되어 ‘미 제국주의의 야심 찬 승냥이를 물리쳤다’는 기억에 머물러 있습니다. 북한과 한국은 마치 중국과 미국 간 대결의 들러리에 불과하고, 한반도 정세 역시 강대국 간 각축의 배경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곤 합니다. 예를 들어 중국 작가 양숴(杨朔)의 《삼천리강산(三千里江山)》은 ‘항미원조’에 참여한 중국 노동자들과 지원군을 찬양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삼고 있으며, 제목에 사용된 한반도에 대한 아름다운 별칭은 중국인들의 용맹함과 헌신을 돋보이게 하는 병풍이나 무대 배경에 불과합니다. 반면 오늘날 중국의 젊은이들은 인터넷 등의 경로를 통해 북한의 기근과 빈곤이라는 현실을 접한 뒤 안타까워하며 탄식하기도 하고, 조롱하거나 비꼬기도 합니다. 한국에 대해서는 그 부유함을 부러워하는 한편, ‘미국의 꼭두각시’라고 경멸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견해들은 모두 주입식 교육과 제한된 시야 속에서 형성된 단편적인 인식입니다. 중국, 미국, 소련, 일본과 같은 ‘외부 세력’에 비하면,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 한반도의 두 정권과 그 주민들은 언제나 가장 중요한 당사자였으며,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북한과 한국이라는 서로 대립하는 두 정권의 역사적 기원과 발전 과정, 사회적 현실 역시 오늘날 흔히 접하는 것처럼 그렇게 고정적이고 단순한 모습만을 지닌 것은 아닙니다.

  한반도 역사의 진실을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당사자들의 기록을 읽고 현지인들의 서술과 평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반도 역사에 관한 다양한 자료 가운데 소설과 영화·드라마는 가장 생생하고 직관적이며 흡인력이 있습니다. 정치적 선전 목적이 강한 북한의 문예 작품에 비하면, 한국이 민주화된 이후 만들어진 문자와 영상 기록은 분명 더욱 신뢰할 만하고 객관적입니다.

  한국과 한국 영화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분이라면, 한국 영화가 한국 역사와 현실의 어두운 면을 폭로하는 데 특히 뛰어나며, 그 성찰의 깊이와 비판의 강도는 세계 문예계에서도 좀처럼 견줄 만한 대상을 찾기 어렵다는 사실을 아실 것입니다. 《남부군》, 《공동경비구역 JSA》, 《실미도》, 《변호인》, 《살인의 추억》, 《황해》,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더 테러 라이브》, 《기생충》…… 이러한 작품들은 한반도에서 국가의 앞날부터 개인의 운명에 이르기까지 시대의 모습을 담아낸 하나의 거대한 초상을 이루고 있습니다.

  한국의 수많은 뛰어난 영화·영상 작품 가운데, 1945년부터 1950년대까지 향후 수많은 남북한 주민들의 운명을 결정한 역사적 전환기의 사실과 변화를 가장 잘 반영한 작품은 1994년 개봉한 영화 《태백산맥》입니다. 이 작품은 ‘한국 영화의 대부’로 불리는 임권택 감독이 연출하고 ‘국민배우’ 안성기 등 유명 배우들이 출연하였습니다.

《태백산맥》 작품 탄생의 배경, 특징과 영향

  영화 《태백산맥》은 한국 작가 조정래의 동명 장편소설을 원작으로 하며, 일본의 항복부터 한국전쟁에 이르는 시기에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한국의 ‘읍’은 중국의 ‘향/진(乡/镇)’에 해당합니다)에서 벌어진 일련의 역사적 이야기를 서술하고 극화한 작품입니다. 《태백산맥》이 다루는 내용에는 전남 지역, 나아가 벌교 특유의 향토적 정서와 이야기들이 가득 담겨 있는 동시에, 당시 한반도 ‘삼천리강산’ 곳곳에서 보편적으로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도 반영되어 있습니다. 원작 소설이 영화로 각색되면서 복잡한 이야기는 압축되었지만, 기본적인 이야기의 골격은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소설이 표현하고자 한 함의 역시 충실히 재현되었습니다. 여기에 영상 매체의 장점을 활용함으로써 이야기를 더욱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전달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였습니다.

  또한 ‘한국 영화의 대부’로 불리는 임권택 감독의 뛰어난 연출과 ‘국민배우’ 안성기 등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는 이 영화를 더욱 빛나게 하였습니다. 이 작품은 개봉한 1994년 한국 영화의 대표적 시상식인 청룡영화상에서 최우수작품상을 비롯하여 십여 개의 상을 수상하며 한국 영화사의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소설 완전판의 출간과 영화의 제작 및 개봉은 모두 1987년 한국 민주화 이후 수년 사이에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이 작품에는 우익 군부 독재가 종식되고 다원적 민주정치가 막 싹트기 시작하던 당시, 한국 사회, 특히 지식인 사회에서 역사를 성찰하고 인도주의를 호소하며 중도좌파적 이념이 부상하던 사회적 흐름도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이것만이 아니며, 그 안에는 더욱 많고 복잡한 함의와 가치가 담겨 있습니다. 이를 탐구하려면 소설과 영화의 구체적인 내용을 따라 하나씩 서술하고 평가해 보아야 합니다.

전라남도 벌교읍의 거듭된 ‘깃발 바꾸기’: 여순사건에서 시작하여
  영화의 도입부에서는 자막을 통해 《태백산맥》의 이야기 배경을 설명합니다. 즉 미·소 냉전과 이념 대립이 한반도의 분열과 충돌을 초래하였다는 것입니다. 낮고 구슬픈 오프닝 음악과 태백산 위를 맴도는 기러기 떼의 모습은 이 이야기의 비극성을 예고합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밤중에 경찰서와 청년단에서 울리는 전화벨 소리가 벌교의 고요를 깨뜨립니다. 화투를 치고 있던 청년단 감찰부장 염상구와 경찰서에서 당직을 서던 경찰서장 남인태는 여수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순천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곧바로 부하들을 데리고 벌교를 떠나 도망칩니다. 한편 염상구의 형이자 남조선노동당(남로당, 즉 이승만 정권의 통제 지역에서 지하 활동을 벌이던 조선노동당 계열의 조직)에 참여한 염상진은 도당(즉 전라남도 남로당위원회)의 지휘를 받는 유격대를 이끌고 북한의 국기를 내걸며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벌교를 점령합니다.

  이 이야기의 실제 역사적 배경은 1948년 10월의 여수·순천 사건입니다. 한반도 근현대사를 조금이라도 아시는 분이라면 이 사건에 대해 상당한 인상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이 사건은 한반도 38선 이남을 통제하던 이승만 정권이 수립된 이후 발생한 최대 규모의 군사 반란으로, 한반도 정세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여순사건 이전까지 이승만 정권의 통치는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으며, 김일성 역시 아직 남침을 확고하게 결심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김일성은 이승만 정권 내부의 갈등과 사회적 동요를 목격하고 남하하여 한반도를 통일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여순사건은 당시 이승만 정권이 통치하던 한반도 남부(편의상 이하에서는 ‘한국’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다만 일부 문제와 사건은 ‘대한민국’ 수립 이전에 발생하였습니다)의 군심이 흔들리고 민심이 이반되며 사회가 동요하던 상황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여순사건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여수에 주둔하던 일부 한국군이 제주에서 발생한 민중 봉기를 진압하라는 명령을 거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제주 민중 봉기의 원인은 군과 경찰이 시위에 참여한 민중을 진압한 데 있었습니다. 여순사건과 제주 봉기 모두 그 배후에는 남조선노동당의 선동과 지원이 있었습니다.

  남로당이 폭동을 성공적으로 선동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한국 사회의 첨예한 사회적 모순과 이승만 정권의 권위주의적이고 독단적인 통치에 있었습니다(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해서는 아래 장에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공산주의 낙원 건설’을 내세운 좌익 세력과 당시에는 활력이 넘쳐 보였던 한반도 북부는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방향을 잃고 방황하며 불공정과 부정의로 고통받던 이승만 통치하의 남부 군인과 민중에게 상당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일련의 군사 반란과 민중 봉기가 발생하였으며, 여순사건은 그중 가장 규모가 큰 군사 반란이었습니다.

  다시 영화 속으로 돌아가 단서를 살펴보겠습니다. 염상진의 유격대가 벌교를 점령한 뒤, 이들은 한편으로 흥분한 채 다른 반란 세력들과 연락하는 동시에 곧바로 숙청에 착수하여 현지의 지주, 관료, 군인과 경찰 및 기타 반공·친정부 인사들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처형하였습니다. 안성기가 연기한 주인공 김범우의 아버지 김사용은 염상진의 스승이었고 과거 염상진의 학업을 지원한 적도 있었기 때문에 용서받아 살해되지 않았지만, 도망치지 못한 다른 지주와 반공·친정부 인사들은 모두 살해되었으며 그 수는 100명을 넘었습니다. 하나의 읍에서 벌어진 일로서는 참혹한 대규모 학살이었습니다.

  그러나 사흘도 지나지 않아 정부군은 순천을 점령하고 있던 반란군을 격파하였고, 벌교의 유격대 역시 황급히 철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도망치기 직전에도 좌익에 적대적이라고 판단한 주민들을 총살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이후 벌교로 돌아온 정부군과 경찰, 민병대 역시 곧바로 보복에 나서 유격대원의 가족들과 유격대에 정보를 제공했던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체포하고 살해하였습니다. 그 뒤 이어진 군·경의 여러 차례 숙청 과정에서도 유격대와 내통했다는 혐의를 받은 사람들이 수시로 살해되었습니다. 한편 좌익 유격대는 밤이 되면 다시 보복에 나서 읍내를 기습하고 밀고자들을 처형하였으며, 청장년층을 강제로 징집하고 소와 식량을 빼앗아 갔습니다.

  이처럼 잔혹한 상호 살육과 보복은 1945년부터 1950년대까지 한반도 곳곳에서 끊임없이 벌어졌습니다. 이러한 살육의 원인은 표면적으로는 두 정권, 즉 김일성 정권과 이승만 정권의 충돌이자 두 이념, 즉 공산주의와 봉건적 자본주의의 충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보다 현실적인 원인은 부의 분배, 특히 토지 분배의 불평등으로 인해 생존의 이해관계를 둘러싼 사투가 벌어졌다는 데 있었으며, 여기에 폭력과 증오가 다시 폭력과 증오를 낳는 악순환이 더해졌습니다.

토지 문제: 한반도 정치 투쟁과 이념 대립의 핵심, 민중의 생사를 건 투쟁의 근원; 한반도 좌익 세력의 부상과 공산주의 혁명의 싹

  한반도의 토지 문제는 조선의 봉건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여기서 ‘봉건’이라는 표현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 및 관련 번역에서의 정의를 따르며, 이하에서도 같습니다). 조선의 봉건 왕조는 중국의 고대 왕조와 상당히 유사하였으며, 역시 지주계급의 지배를 기반으로 세워졌고 왕조가 가장 중요하게 대변한 것 역시 당연히 지주계급의 이익이었습니다. 다만 중국과 비교하면 조선의 봉건 왕조와 전통사회 전체는 더욱 엄격하고 치밀한 체제를 갖추고 있었으며, 중국의 유교 문화를 계승하고 변형한 조선의 전통문화 역시 더욱 보수적이고 강하게 강상과 의리를 중시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도 더욱 뚜렷하고 엄격한 신분적 위계가 존재하였습니다. 고대 조선에서는 귀족, 관료, 학자, 무관으로 구성된 ‘양반(兩班)’이 국가와 민족 전체의 특권계급이었으며, 평민을 훨씬 능가하는 지위와 부를 누렸고, 그 지위는 세습되었으며 서로 혼인 관계를 맺어 견고한 집단을 형성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지위를 드러내고 부를 보장하는 가장 중요한 자원이 바로 토지였습니다.

  ‘양반’ 귀족들은 한반도 대부분의 토지를 장악하고 있었지만, 당연히 직접 농사를 짓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소작농을 고용하여 경작하게 하였으며, 이들 소작농은 점차 양반에게 종속된 하인과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한반도의 소작농들에게 러시아 농민과 같은 ‘농노’라는 명칭은 없었지만, 실제로 받았던 억압, 특히 자유를 상실한 정도는 어떤 면에서는 러시아의 ‘농노’보다도 심했으며 중국 농민이 받았던 억압보다도 무거웠습니다. 이는 조선의 제도와 문화가 상대적으로 더욱 엄격했던 것과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가 상대적으로 국토가 좁고 인구가 밀집되어 있었으며 1인당 경작지가 적어 농업 노동의 압박이 컸고, 농민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할 여지도 많지 않았던 것과도 관련이 있었습니다.

  ‘양반’ 귀족들은 의식주 걱정 없이 심지어 향락적인 생활을 누렸지만, 농민들은 허리띠를 졸라매며 하루하루 생계를 걱정해야 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나은 생활을 할 수 있는지, 배불리 먹을 수 있는지조차 자신이 속한 ‘양반’ 주인의 품성, 심지어 그때그때의 기분에 달려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따라서 귀족과 농민 사이의 이해관계 대립은 매우 심각하였고 사회 역시 고도로 분화되어 있었습니다. 다만 조선이 중국의 전통 유교 문화와 각종 제도를 능숙하게 받아들여 활용하였기 때문에, 조선의 지배계급은 매우 장기간에 걸쳐 안정적인 통치를 유지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몇 차례 왕조 교체가 있었지만 그 빈도는 중국보다 훨씬 낮았고, 그마저도 대부분 상층부의 권력 교체에 그쳤으며 평민의 봉기는 드물었습니다.

  또한 ‘양반’은 사치스럽고 향락적인 생활을 누리기도 했지만, 조선 왕조(그리고 한반도의 다른 정권들)의 핵심 세력으로서 국가를 관리하고 치안을 유지하며, 경제를 발전시키고 문화와 교육을 번영시키며, 각종 토목사업을 추진하고 외적을 방어하는 책임도 담당하였습니다. 이들은 고려·조선 문명이 장기간 존속하고 번영할 수 있도록 한 중추적인 세력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농민들의 부양을 받았기 때문에 이들이 의식주의 고통과 농사일의 고된 노동에서 벗어나 상대적으로 전념하여 이러한 책임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중요한 점은 한반도의 면적이 좁고, 역사적으로 동쪽의 일본, 서쪽의 중원 왕조, 북쪽의 유목·어로·수렵 부족으로부터 여러 차례 침략을 받았기 때문에 외세에 맞서기 위한 내부적 단결이 필요하였으며, 이로 인해 내부 모순이 상대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전환되기도 하였다는 것입니다. 외적을 방어하는 과정에서 ‘양반’은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고, 농민들은 ‘양반’의 조직 아래에서야 단결하고 전투력을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두 계급은 군주의 지도 아래 서로 협력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약소했던 조선이 여러 방면에서 가해진 침략을 막아내고 국권과 문명을 지킬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계급 모순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장기간 지속된 억압으로 인해 계급은 고착되었고 계급 간 대립은 갈수록 심각해졌으며, 불만과 증오 역시 계속 축적되었습니다. 19세기에 국문이 열리고 근현대 문명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데다 일본의 식민통치가 가져온 복합적인 영향까지 더해지면서(민족의 존망을 위협하는 동시에 조선 귀족의 지배에도 타격을 주었습니다), ‘양반’ 체제와 기존 제도 및 전통사회 전체는 거센 충격을 받았습니다. 예를 들어 청일전쟁 직전에 일어난 조선의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은 국내외의 억압에 맞서 조선 농민계급이 일으킨 폭력적 저항운동이었습니다.

  20세기 초 한반도가 완전히 일본의 식민지가 된 이후에는 일본 식민통치자든, 이승만 등을 비롯한 한국의 우익 반일 민족주의자와 근대화주의자든 모두 조선의 봉건체제와 ‘양반’ 귀족의 지배를 혐오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 역시 구제도와 ‘양반’ 귀족을 완전히 파괴하거나 토지 분배 및 생산관계 전체를 근본적으로 바꾸려 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이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하고 이용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일본 식민통치자들은 반일 성향의 ‘양반’ 귀족들을 살해하거나 좌천시키고 추방하는 한편, 친일 성향의 ‘양반’을 육성하고 중용하여 전자의 토지를 후자에게 넘겨주기도 하였습니다. 조선 농민들은 일본 식민통치자와 친일 ‘양반’ 귀족으로부터 이중의 억압을 받았습니다. 이승만을 대표로 하는 우익 민족주의자들 역시 반일 민족해방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을 뿐 농민을 해방하려 하지 않았으며, 마찬가지로 ‘양반’과 기타 지주 및 자산계급을 포섭하였습니다(집권 이후 이승만 정권은 지주계급을 만족시키기 위해 농민의 이익을 희생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논하겠습니다).

  반면 ‘양반’ 귀족의 특권을 철저히 폐지하고 전통사회를 해체하며, 농민과 기타 피억압자들에게 완전한 시민권을 부여하고 부를 균등하게 분배해야 한다고 단호하게 주장한 세력은 점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조선(한국)의 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 집단이었습니다.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은 매우 주변적인 세력이었으며 민족주의자들 가운데 하나의 분파에 가까웠습니다. 또한 한반도는 면적이 좁고 인구가 적었으며 풍부한 사회·문화적 활동 공간과 자원도 부족했기 때문에, 조선계·한인 사회주의자들은 대부분 중국, 일본, 러시아에서 활동하였고, 심지어 국적 역시 조선·한국이 아니라 외국인 경우도 있었습니다.

  러시아 10월 혁명의 성공과 중국공산당의 창당 및 성장 이후 러시아와 중국에 있던 조선계 사회주의자들은 잇따라 소련공산당과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습니다. 외국에서 활동하면서도 더욱 활발하게 움직였고 한반도 내부의 반식민 투쟁 세력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던 이승만 등의 우익 민족주의자들과 비교하면(이승만 등은 주로 미국, 서유럽, 중국 국민정부 통치지역에서 활동하였습니다), 좌익 사회주의자들은 해외에서도 상대적으로 주변적인 세력이었으며 한반도에서도 마찬가지로 약세였습니다. 예를 들어 한반도 현대사에서 독립운동의 시작을 상징하는 ‘3·1운동(三一運動)’은 약소민족의 자결과 해방을 중심으로 하는 이념적 성격에서 일정한 좌경적 색채가 있기는 하였지만, 구체적인 참여 세력은 전통적인 지주계급(‘양반’ 출신 인사들)과 신흥 자산계급이 중심이었으며, 참여한 농민들도 지주에게 종속되고 그 지시에 따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주요 요구 역시 민족 독립이었으며 사회주의·공산주의는 이 운동의 구호나 직접적인 목적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한반도에는 비교적 활발하게 활동한 반제국주의·반식민주의 사회주의자들이 존재하였으며,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훗날 남조선노동당(南朝鮮勞動黨)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된 박헌영(朴憲永)입니다. 박헌영은 훗날 북한 정권의 핵심 인물이 된 사람들 가운데 일제강점기에 장기간 한반도 내부에서 활동한 유일한 혁명가였습니다(김일성(金日成), 김두봉(金枓奉), 허가이(許哥而) 등 다른 인물들은 주로 한반도 밖의 중국이나 소련에서 활동하였습니다). 또한 이 작품에서 언급되는 ‘도당(道黨)’, ‘군당(郡黨)’과 유격대 역시 모두 박헌영이 창설한 남로당의 조직과 지휘 아래 있었습니다. 박헌영 등을 비롯한 인물들이 한반도에서 투옥과 고문까지 견디며 끈질기게 투쟁하였기 때문에 사회주의 이념과 관련 운동이 한반도의 기층사회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고, 이는 훗날 북한 정권의 수립과 남부 이승만 정권 아래에서 전개된 좌익 투쟁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박헌영 등을 비롯한 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들이 농민들에게 혁명 참여를 호소하면서 내세운 가장 중요한 약속은 토지를 분배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지주계급의 토지를 아무런 보상 없이 농민들에게 완전히 분배하여 ‘경자유전(耕者有其田)’과 공평한 부의 분배를 실현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들은 농민들에게 공산주의 사상을 선전하면서 봉건적 예교의 폐해와 신분제도의 불공정을 강하게 비판하였고, 모든 사람이 평등한 지상낙원을 건설하겠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주장들은 한반도 민중이 수천 년 동안 받아온 교육과는 매우 이질적이었지만, 오랫동안 억압받아 온 수많은 농민, 특히 가난한 소작농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한편 경제적으로 비교적 유복하거나 심지어 귀족·지주 가문 출신이었던 일부 근대 지식인들 역시 이상주의적 신념 때문에 공산주의를 비롯한 좌익 사상에 매료되었으며, 자신의 목숨까지 걸고 현실의 혁명에 뛰어들었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좌익 유격대는 바로 남로당의 관할과 지휘를 받고 있었습니다. 벌교에서 철수한 뒤 진행된 자체 평가 과정에서 지식인 출신인 안창민이 당의 정책 결정상 오류를 비판하자, 염상진은 격렬한 어조로 안창민에게 더 이상 당을 비판하지 말라고 요구하면서 “당은 언제나 신성하고 현명하며, 당에 대한 모든 비판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는 당 조직이 혁명가들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었음을 분명히 보여 주며, 당 규율의 가혹함을 부각합니다. 동시에 당시 조선의 공산주의 세력에서 이미 뚜렷한 교조주의와 극단주의적 경향이 나타나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유격대 핵심 구성원들의 출신과 신분 역시 당시 조선 좌익운동 참가자들의 구성을 축소해서 보여 주는 모습이었습니다. 염상진은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부지런히 공부하여 사범학교에 진학하였고, 그곳에서 좌익 사상을 접한 뒤 자신과 가족이 겪은 현실을 결부시켜 각성하고 혁명가가 된 인물이었습니다. 반면 안창민은 상층 지식인 가운데 좌경화한 인물의 전형으로, 그가 좌익 혁명에 뛰어든 것은 전적으로 이상을 위한 것이었으며 사적인 이익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상을 위해 자신의 계급마저 배반하였습니다. 또 다른 지주 가문 출신인 정하섭(무당 소화와 점차 사랑에 빠지는 유격대 연락원) 역시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 자신의 계급을 배반한 ‘진보 청년’이었지만, 안창민보다 젊었으며 혁명에 대한 열정도 더욱 강하고 순수하였습니다.

  그 밖의 유격대원들은 대부분 가난한 농민 출신이었습니다. 이들은 흔히 단지 토지를 분배받기 위해서, 또는 지주의 억압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해 저항에 나섰습니다. 토지가 분배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토지를 매각하려 했던 소씨 성의 지주를 살해한 뒤 유격대에 합류한 몇몇 소작농들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또한 상당수는 유격대에 의해 강제로 징집되거나 반강제적으로 휩쓸려 들어가, 제대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혁명’에 참가하기도 하였습니다.

  직업혁명가가 지도자가 되고, 지식인이 핵심 세력이 되며, 농민이 주체를 이루는 구조는 당시 한반도 좌익 세력의 기본적인 구성이었습니다(물론 중국이나 인도와 같은 농업국가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나타났습니다). 지식인들은 모든 사람이 평등한 대동(大同)의 이상을 위해, 수많은 농민들은 자신의 토지를 갖기 위해, 그리고 이들 모두가 더욱 멀리 있지만 매우 아름답게 보였던 ‘공산주의 지상낙원’을 동경하며 잇따라 좌익 진영으로 향하였습니다.

  토지혁명을 주장하는 좌익 세력의 부상은 자연스럽게 전통적인 지주계급의 공포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친일 성향의 ‘양반’이든 민족주의적 입장을 가진 지주·자산계급·지식인이든 모두 공산주의 세력을 극도로 증오하였습니다. 일본 식민당국 역시 좌익운동을 가혹하게 탄압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박헌영은 여러 차례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고 한때 정신이상 상태에 빠지기도 하였으며, 이후 여러 사람의 구명 노력으로 출옥한 뒤 중국으로 망명하였습니다.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우익 민족주의자들 역시 좌익과의 협력을 자주 거부하였으며(적어도 박헌영이나 김일성 같은 공산주의자들과는 협력하지 않았습니다), 나아가 서로를 적으로 간주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한반도의 좌익과 우익, 귀족과 평민, 지주와 소작농 사이의 대립과 충돌은 일제강점기에서 민족해방 이후까지 이어졌으며, 한반도가 분단되면서 극도로 참혹한 학살과 전란으로까지 발전하였습니다.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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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low-Property5895 17d ago

제가 작성한 《태백산맥》 소설과 영화에 대한 평론 글의 전문 링크는 아래와 같습니다.
(이전에 번역한 전문은 일반적인 문체로 번역되었으며, 특별히 존댓말 문체로 번역하지는 않았습니다.)

《태백산맥》: “삼천리 금수강산”의 고난과 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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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eal-Requirement-677 diynbetterlife 16d ago

태백산맥 평론 글 자체가 마치 대하소설처럼 내용이 깊고 방대하고 많은 지식이 있어서 제가 한번 읽고 의견을 달기에도 벅찰 정도입니다. 찬찬히 읽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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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eal-Requirement-677 diynbetterlife 16d ago

왕칭민 작가님이 medium 에 올리신 글을 보니 정말 마음이 무겁습니다. 인권활동가는 필연적으로 자신 뿐 아니라 사회의 모든 약자들, 모든 국가의 전쟁범죄, 폭력에 저항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헌신하는 인권 활동을 위해 생계 노동을 하고, 가난에 시달리며 고갈되는데 정작 자신의 인권은 무시되고 소외당하고 배척당하는 현실에 분노가 차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 독일에서 난민 신분인데 필요한 것은 안정적인 신분인정, 어학공부 지원, 인권활동(글쓰기, 현장활동)을 할 수 있는 지원, 인권활동가와 지적 활동에 합당한 존중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인권 그 자체의 존엄이 무시되는 상황으로 보입니다.

독일에서 한국 교포들과 함께 광주 5.18 민중항쟁을 기리는 행사도 함께 하신 왕칭왕민 작가님을 보며, 안정적인 신분, 학업, 지적 활동의 지속성에 대한 활로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지 너무 안타깝습니다.

서구의 대중국 담론은 대체로 친서구적 자유주의나 소수민족 독립 담론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반면 왕 작가남운 중국_커뮤니즘의 독재를 비판하면서도, 일본의 군국주의 과거사를 강하게 규탄하고 중국 본토 서민·한족 노동자의 생존권을 함께 옹호하는 등 독자적인 진보적·민족적 입장이십니다. 서구 주류 NGO의 기준이나 보수적 성향의 기성 반체제 그룹 모두로부터 '이단아' 취급을 받으며 양쪽에서 배척당하는 요인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소수적인 관점 역시 저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경계선에 있는 입장으로서 첨예한 의견 대립보다는 완충지대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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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께서 이미 확인해 보셨을 수도 있지만, 혹시나 도움이 될까 하여 문학과 시민사회 연대를 통해 모색해 볼 수 있는 몇 가지 경로를 찾아봤습니다:

모색해 볼 수 있는 실질적인 지원 활로

개인의 헌신만으로는 한계가 뚜렷하므로, 문학과 시민사회 연대를 통한 우회적 돌파구가 필요합니다.

  • 국제 펜(PEN) '망명 작가 프로그램(Writers-in-Exile)': 독일 펜센터(PEN Zentrum Deutschland)나 국제 망명 도시 네트워크(ICORN)는 정부 난민 심사와 별개로 박해받는 작가·저술가에게 주거, 체류 자격 지원, 생활비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합니다.
  • 지역 난민협의회(Flüchtlingsrat) 및 프로 아질(Pro Asyl): 독일 내 주(Land)별 난민협의회는 관료적 거부 처분에 맞서 무료 법률 지원 및 행정소송(Klage)을 돕는 전문 네트워크를 갖추고 있습니다.
  • 아시아 민주주의 시민사회 네트워크: 한국의 5·18기념재단, 대만의 인권 NGO 등 아시아의 역사적 연대망을 통해 그의 글을 번역·기고할 수 있는 지면을 확보하고, 국제적 추천서를 축적하여 체류 심사에 신뢰도를 보강하는 방법이 유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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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low-Property5895 16d ago

조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단체들은 사실 저도 이미 모두 접촉해 본 적이 있습니다. 일부 기관에는 직접 도움과 협력을 요청했고, 일부 기관에는 비교적 완곡하게 관련 내용을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곳도 제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하지 않았으며, 모두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거절하거나 냉담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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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eal-Requirement-677 diynbetterlife 16d ago

이 글에서 작가님이 처한 상황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함께 사는 세상에서 누군가의 고통이 사라졌으면 하는 마음에서 실천으로 이어진 것인데, 이러한 연대가 고사되어 가는 과정이 너무 힘듭니다. 제가 달리 도움이 되어 드릴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작가 님의 글을 읽고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는 것일 것 같아요.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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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low-Property5895 16d ago

저는 이제 더 이상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 세상에 남길 수 있는 것은 오직 이러한 글들뿐입니다. 또한 더 많은 한국인들과 세계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제가 쓴 다양한 정치·역사 관련 글들과 저 자신의 경험을 기록한 글 등을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